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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위로의/일기

Viewpoint: 보는 방식

by 느린위로 2013. 9. 29.


똑같은 현상을 보는 방식에는 수도 없이 많은 경우의 수가 있다.

여기에 이분법을 적용해서 '좋게 보기'와 '나쁘게 보기'가 있다고 하자.


나는 19살까지, 내 최대의 장점이 '좋게 보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진짜로 그렇게 살았다. 어디서 연유된 성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안 좋은 일이 있어도 별 일 아닌 것처럼 넘길 수 있었고, 늘 다음을 보곤 했다.


그런데 20살의 겨울 즈음, 나는 그 모든 것을 한번에 잃었다.

사람으로 인한 상처는 그 사람이 아니면 사실 100% 치유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1년여 정도를 '버텼다'. 억지로라도 그러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았으니까. 


절반 정도 아물었을 때에 고마운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었지만, 나는 빠르게 회복되어갔다.

'좋게 보는 법'을 되찾았고, 행복이란게 뭔지도 다시금 알게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고마움을 너무도 쉽게 잊어 버렸다.

어쩌면 너무 쉽게 찾아왔기 때문이었을까. 그때는 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받은 상처를 똑같이, 아니 어쩌면 더 많이, 다른 누군가에게 주었다.


그 때는 몰랐다.

사람을 버리는 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더군다나 그 사람이 힘들 때라면 말이다.


그렇게 '좋게 보는 법'을 되찾은 나는, 그러나 이상하게도 무엇인가 텅 빈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곳에서 불쑥 나타나

가치관, 생활 방식, 심지어 성격까지, 내 많은 것들을 순식간에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놀라운 순간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내 스스로도 알아챌 수 없을만큼 조용히 하지만 서서히

그 사람은 나를 몰랐던 때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내가 가장 힘든 때에 나를 버렸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서 울기만 했다.

온갖 슬픈 것들을 찾아 보고 들으며 아파했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들 속을 헤매었다.

'나쁘게'만 모든 것을 보기 시작하자, 나쁜 일만이 주변을 맴돌았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렴풋이,

그 때, 나도 누군가를 이렇게 버렸었던가,

드는 생각과 함께 나는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잊고 있었던 나만의 '보는 방식'을.


*


여기에 똑같은 것에 대한 두 노래가 있다.


하나는 성시경의 '잃어버린 것들'.



또 하나는 권순관의 '변하지 않는 것들'



제목을 보거나 직접 들어보면 알겠지만, 첫 번째 곡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두 번째 곡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고마움을 노래하고 있다.


고민 끝에, 나는 후자를 더 좋아하기로 했다.


언젠가 또 내 '보는 방식'이 바뀌어 첫 번째 곡이 더 생각나는 밤이 또 온다고 하여도

당분간은 '좋게 보는' 연습을 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단지 버티는 것이 아니라 '이겨내려' 한다.


감사함으로.

묻어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