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5 사랑이 한 권의 책이라면 나는 사랑에 있어 그렇게 착한 편이 아니었다. 조금만 수가 틀리면 헤어지자는 말을 불쑥 꺼내 들었고, 그러다 기분이 좋아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먼저 사과를 건네기도 했다. 누군가가 그랬다. 사랑할 때 가장 마지막에 꺼내야 하는 카드가 '이별'이라고. 아무렇게나 그 카드를 남발하면 분명 후회할 때가 올 거라는 경고였다. 나는 그 경고를 무시한 덕분에 호기롭게 먼저 꺼내든 이별 카드에 역으로 카운터 펀치를 맞곤 했다. 상대편이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는 듯, "그래, 헤어지자"라는 수긍을 했던 것이다. 사랑을 쉽게만 여겼기 때문일까. 그것보단 실은 나를 좀 더 봐달라는 투정이었을 것이다. 상대방도 그걸 아예 모르진 않았기에, 왜 그러느냐고 달래기도 하다가 종국에는 지쳐버린 채 그 카드를 받아든 것이리라. 20.. 2020. 2. 27. 그와 함께면 더는 외롭지 않았다 두 번째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연극 연습 이외의 시간에도 만났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와 함께면 더는 외롭지 않았다. '외롭다고 사람을 만나선 안 된다'는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다. 여태 외로워서 만난 남자들과는 모두 얼마 되지 않아 헤어졌다. 반대로, 그는 내가 커다란 고독 끝에 혼자인 것에 익숙해지고 있을 즈음에 나타났다. 즉, 외로워서 만난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내 어딜 가든 꼭 붙어 다니는 연인이 되었다. 나중에는 그가 내가 사는 건물의 다른 호수에 이사를 오기도 했다. 우리는 동거 아닌 동거를 즐겼다. 부모님이 찾아오는 날이면 그는 자기 방에서, 나는 내 방에서 머물며 짜릿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부모님의 얼굴을 본 남자친.. 2020. 2. 27. 우울의 정체 1 2009년 가을 언저리에 휴학을 하고 귀향한 나는 전형적인 우울증 환자의 증세를 보였다. 방에 틀어박혀서 책을 봐도 울고, 영화를 봐도 울었다. 한참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일도 잦았다. 그렇게 꼬박 6개월이 지났고, 어느덧 밖은 봄이었다. 온몸이 우울에 젖어 있던 나는, 그제야 조금씩 뽀송해지기 시작했다. 아직 학교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지만, 서울은 그리웠다. 그래서 휴학을 한 상태로 서울에 올라가 영어 학원에 다녔다. 학원 근처에 숙소를 잡고, 학원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아르바이트 장소는 잠실역 안쪽에 자리한 XX 모바일 샵이었다. 당시로써는 꽤 괜찮은 시급에 일도 쉬운 편이었다. 다른 동기들과 조금 다른 삶을 산다는 게 그렇게 기분 나쁘거나, 불안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오히려 혼자만의 .. 2020. 2. 27.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겨울을 난다 대학교 신입생 OT는 늘 엊그제 일인 것 같다. 나는 시골에서 올라온 티를 최대한 내지 않으려고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한 교실에는 마흔 여 명의 새내기들이 몇몇 조로 나뉘어 앉아 있었고, 고작 한두살 많은 학생들이 선배랍시고 수강 신청 방법 같은 걸 알려주었다. 이어서 일대일로 대학 생활에 대한 전반적인 안내를 해준다는 취지의 멘토와 멘티 프로그램도 소개되었다. 직속 선후배가 생기는 셈이었다. 나는 한눈에 봐도 모범생 티가 나는 남자 선배에게 배정되었다. 선배와는 아직까지도 연락을 하고 지내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대학교 1학년 생활 중에 내가 가장 뚜렷하게 기억하는 사건이다. 나는 곧 다른 대학교 출신의 학생과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같은 학교 아이들과는 멀어졌다. 지금도 대학 .. 2020. 2. 27. 괜찮다, 정말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괜찮다'라는 말이 풍기는 패배적인 뉘앙스가 싫었다. 그만하면 잘했어 정도의, 그러니까 결국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을 때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처럼, 괜찮기도 꽤 힘이 드는 때엔, '괜찮다'라는 말에 내재된 온기가 문득 고맙다. 당장 일을 그만둘 수는 없기에 힘든 몸을 가누며 아침에 지하철에 오르더라도. 사랑하는 이 없어 외로운 밤이 문득 사무칠 때도. 혼자 해먹는 요리와 곁들이는 맥주가 물릴 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가고 있고, 아직 내 인생은 끝난 게 아니니까. 당신이 없어도, 나는 괜찮다, 정말. 2020. 2. 27.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