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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위로의/영화·TV·OTT

'그녀(Her)', 누가 감히 이들의 사랑을 재단하는가

by 느린위로 2014. 5. 30.

'그녀(Her)', 누가 감히 이들의 사랑을 재단하는가



영화 '그녀(Her)'에 대한 평가 중 '가장 독창적인 사랑 이야기'라는 말에 잔뜩 기대했다. 너도나도 하는 사랑이지만, 내 사랑만큼은 그 누구의 것보다 특별하다 여기는 것이 인간이기에, 도대체 어떤 사랑을 '가장 독창적'이라고 볼 수 있는지 궁금했다. 아니, 애초에 '사랑'을 두고 '독창적'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기는 한 걸까? 포스터는 전혀 이 의문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강렬한 붉은빛 배경에 호아킨 피닉스의 그윽한 눈빛이 인상적이기는 했다만, 서툰 당신을 안아줄 이름이라는 '그녀'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스포일 주의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야 왜 포스터에 정작 그녀는 없는지 알게 되었다. 그건 그녀가 인공지능 OS(Operating System)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그녀는 살아 숨 쉬는 인간이 아니라 컴퓨터 속에 존재하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프로그램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듯하다. 그녀는 분명 프로그래밍이 된 소프트웨어이지만, 감정과 직감을 가지고 있어 인간과 마찬가지로 경험에 따라 변화(혹은 진화)하기 때문이다.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그녀 '사만다(스칼렛 요한슨 목소리 출연)'는 前 부인 캐서린(루니 마라 분)과의 이혼을 겪으며 괴로워하던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 분)에게 큰 위안이 되어준다. 역으로, 그녀는 그를 통해 새로운 감정들을 배워간다. 점차 서로에 대한 친밀감을 키워가던 이들은 결국 사랑, 혹은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법한 감정에 빠지게 된다. 인간과 OS의 사랑은 진실한 사랑일까?





  이 문제에 관해 감독 스파이크 존즈(Spike Jonze)는 흑과 백의 논리를 들어 답하지 않는다. 그녀를 비롯한 영화 속 모든 OS처럼 말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롭다고 느낀 부분은 테오도르가 사만다와의 관계를 다른 이들에게 말할 때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별반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 역시 조금은 뜻밖이었다)

  어쨌거나 이후 테오도르는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다시 잠들 때까지, 하루 대부분의 일과를 사만다와 함께하며 그녀와 둘도 없는 사이가 된다. 前 부인과의 이별 후 우울한 나날들을 보내던 그는 매사 긍정적인 그녀와의 관계를 통해 점차 밝아진다. 마침내 이혼 서류에 서명하기 위해 캐서린을 만나러 가는 길, 그녀와 통화를 하는 그의 여유로운 목소리는 잠시나마 이 둘의 핑크빛 미래를 그려보게 한다. 물론 테오도르와 캐서린의 재회에 대해 왠지 초조해하는 듯한 사만다목소리가 마냥 행복한 결말에의 추측을 방해하긴 하지만.







  사만다의 직감이 맞았던 걸까. 그녀 이야기를 털어놓는 테오도르에게 캐서린은 독설을 퍼붓는다. "당신은 늘 순종적인 여자를 원했지" "당신은 단지 진짜 감정을 감당할 수 없는 거야"라며 인간과 OS 간의 사랑에 대해 영화 속 인물 중 처음으로 불쾌함을 표한다. 가슴을 후벼 파는 캐서린의 말에 테오도르는 사만다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마 관객 대부분도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이 사랑은 진짜일까? 아니, '진짜 사랑'이 도대체 뭐지?

  테오도르의 절친한 친구로 등장하는 에이미(에이미 아담스 분)는 이러한 철학적 고민에 '그까짓 것(Fuck it)'이란 태도로 응수한다. 어차피 길지 않은 인생, 남 눈치 보지 말고 나 좋은 것 하며 행복하게 살자는 거다. 에이미의 조언에 힘을 얻은 테오도르는 잠깐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고 사만다와의 관계를 지속해나간다.



 




 

  하지만 '인간'과 'OS'는 분명 서로 다른 존재다.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그렇고, '그'와 '그녀'가 그렇듯. 어느 날,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로 잠시 사라진 사만다를 간절하게 찾던 테오도르는 마침내 이를 깨닫게 된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사용하는 프로그램인 그녀는 그와 이야기하는 동시에 수천 명의 사람과 대화하며, 또 수백 명의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다.

  "넌 내 것이거나, 아니면 내 것이 아니야(You are mine or you are not mine)"라는 그의 말에 "난 네 것이야, 그리고 난 네 것이 아니야(I am yours and I am not yours.)"라 대답하는 그녀. 이들은 서로 너무나 사랑하지만, 그 방법과 방향이 다르기에, 결코 함께 할 수 없다.

  여기서 생각해볼 만한 부분은 바로 영화 속 사랑을 바라보는 사만다의 관점이 테오도르의 관점에 비해 부족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에 '그녀'는 '가부장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Akiko Stehrenberger가 새롭게 제시한 '그녀'의 포스터는 확실히 흥미롭다. 그를 만지는 그녀의 손, 그리고 그의 귀에 꽂힌 이어폰의 확대를 통해 그보다는 그녀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이들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지만, 이를 두고 '슬프다'고 말하기도 모호한 것은 그만큼 난해한 결말 때문이다. 테오도르는 떠나야 하는 사만다를 향해 "한 번도 당신을 사랑한 것처럼 다른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없다(I've never loved anyone the way I loved you)"는 고백을 한 뒤, 얼마지 않아 캐서린에게 사랑이 가득 담긴 메일을 보낸다. 그리고 에이미와 함께 사만다와 이야기를 나누던 옥상에 올라 한숨을 짓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이로써 관객들은 엄청난 혼란에 빠진다. 대체 그와 그녀의 사랑은 뭐였지? 그와 캐서린의 관계는? 그와 에이미는 또 뭐지? 아,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고, 관계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본디 스파이크 존즈의 영화는 수많은 질문을 낳지만, 그 어떤 명확한 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존 말코비치 되기 Being John Malkovich>가 그랬고, <어댑테이션 Adaptation>이 그랬다. 관객 자신이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답을 찾으면 그뿐이라는 걸까. 개인적으로 에이미의 대사가 적절한 답지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에이미는 자신과 사만다와의 관계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지 묻는 테오도르에게 답한다. "글쎄, 나는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지. 넌 어떤데?"라고. 그래, 적어도 사랑에 관해 정해진 답은 없다. 내가 그 사랑 덕분에 행복하다면 그뿐, 남의 의견 따위 무시해도 좋다. 사랑은 그 사랑에 속한 이들이 함께 정의해 나가는 거니까.






영화 속 잔잔하게 흐르던 그와 그녀의 음악 "The Moon Song"을 다시 한 번 들으며, 포스팅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