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 지금, 당신이 꿈꾸던 삶을 살고 있나요?
이런 종류의 영화를 사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아트 영화(혹은 예술 영화)라는 말을 좋아하긴 하는데, 그럼 어떤 영화가 '예술'이라 불릴만하고 또 어떤 영화는 아닌가에 대한 기준이 사실 명확하게 서지 않은 나로서는 이 역시 그다지 정확한 명칭은 아닌듯싶다. 어쨌거나, 보고 나면 잔잔했던 일상에 조그맣게나마 파문을 일게 하고, 스스로 여러 질문을 던지게 하는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그런 영화다.
스포일 주의
스위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살아오던 주인공 레이몬드 그레고리우스(제레미 아이언스 분)는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강물로 뛰어들려고 하던 한 여인을 구한다. 그 여인은 레이몬드를 따라 학교에 왔다가 자신의 빨간 코트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버리는데, 레이몬드는 그런 그녀에게 끌려 수업도 내팽개친 채 코트만을 들고 그녀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그녀. 레이몬드는 그 어떤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그녀의 코트를 확인하고, 그 안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한다.
책의 첫 장에 찍힌 직인에 따라 헌책방에 도착한 레이몬드는 그곳에서 책 속에 끼워져있던 리스본행 야간열차표를 보게 된다. 곧바로 기차역으로 향한 그는 무작정 열차에 올라타고, 리스본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내내 책을 읽는다.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제목의 책은 아마데우 프라두(잭 휴스턴 분)라는 포르투갈 사람이 쓴 것으로, 레이몬드를 단숨에 사로잡는다.
사실 레이몬드가 이토록 무모하고 충동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그가 지루하고, 외로우며, 공허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무미건조한 일상으로부터 자신을 깨워줄 무언가가 절실했으리라.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그의 손에 쥐어진 이 한 권의 책이 바로 그 역할을 한 것이다.
그렇게 리스본에 도착한 레이몬드는 책의 저자인 아마데우의 집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그의 여동생 아드리아나(샬롯 램플링 분)를 만난다. 아마데우는 이미 죽은 뒤였지만, 레이몬드는 이후에도 계속 책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을 한 명씩 만나면서 아마데우의 삶을 되짚는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치부할 수 없는 집요함으로, 자기 일과 삶도 내팽개친 채 아마데우에 대해 아는 것이 과연 레이몬드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이 무엇이건, 레이몬드는 아마데우의 삶에 깊이 매료된다. 자신의 인생이 그의 것에 비추어 보았을 때, 보잘 것 없이 느껴진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아마데우는 자신이 가진 신념에 따라 행동할 줄 알았고, 따뜻한 마음과 함께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철학자이자 의사였고, 혁명가이자 작가였다. 무엇보다도, '언어의 연금술사'였다. 과거의 아마데우가 현재의 레이몬드를 통해 되살아나는 우연은 새로운 운명을 낳는다.
꼭 요란한 사건만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이 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운명이 결정되는 극적인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삶에 완전히 새로운 빛을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일어난다.
그 놀라운 고요함 속엔 고결함이 있다.
아마데우가 적은 것처럼, <리스본행 야간열차>에는 수많은 사소한, 그러나 운명을 결정짓는 우연이 등장한다. 비 오는 날, 레이몬드와 한 여인과의 만남이 그랬고, 그로써 레이몬드가 손에 넣게 된 아마데우의 책이 그랬다. 이후 리스본을 헤매던 레이몬드는 부서진 안경을 수리하기 위해 찾아간 안경원에서 마리아나(마르티나 게덱)를 만난다. 그녀의 삼촌은 아마데우와 함께 레지스탕스(독재 정권에 대항하는 혁명 단체) 활동을 하던 사람이었으니, 그렇게 그들의 우연은 인연으로 연결된다.
며칠 후, 아마데우의 인생에 대해 알아보는 것을 마친 레이몬드는 스위스로 돌아가려는 기차 앞에 서고, 마리아나는 그런 그를 배웅한다. 기차가 떠나기 5분 전, 공허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탄식을 내뱉는 레이몬드에게 마리아나는 말한다. "그럼 그냥 여기 있지 그래요? Why don't you just stay?"
"지금, 당신이 꿈꾸던 삶을 살고 있나요?"라는 포스터의 문구에 마음이 간다. 레이몬드는 아마데우에 대해 알아 가면서 자신이 삶에서 놓치고 있던 것들에 대해 자꾸만 돌아보게 되었던 게 아닐까.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사실 정확히 나열할 수 없다. 마치 도입부에서 이 영화의 장르를 규명 짓기 어려웠듯,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이 영화가 아주 마음에 들었던 것은 마지막 마리아나의 대사다. 지금, 내가 꿈꾸던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기꺼이 그것을 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이 나를 전율시켰기 때문이다. 아마 레이몬드도 그랬으리라.
'리스본행 야간열차', 지금, 당신이 꿈꾸던 삶을 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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