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행복의 8할은 서울이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어느 어린 시절, 서울로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다. 환상의 나라라는 에버랜드였다. 그때 내게 서울이란 '에버랜드가 있는 도시'에 불과했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쭉 그랬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니며 이 도시에 조금 익숙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에버랜드는 사실 서울에 있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20살의 내게 서울은 무엇이든 크고, 높고, 빨랐다. 생전 처음 들어본 프랜차이즈 식당도, 골목 하나에 늘어선 똑같은 여러 개의 커피 전문점들도 내 눈에는 모두 낯설었다. 조금 설렜던 것도 같다. 처음으로 혼자 살고, 시간표를 내 스스로 짜고, 여러 다른 도시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며, 나는 이내 서울이란 '대단한 도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3월에 처음으로 사귀게 된 남자친구와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이별을 하게 된 내게 서울은 '가장 추운 도시'로 변했다. 시름시름 앓다보니 어느덧 겨울이었다. 그 때 나는 한 뼘도 되지 않는 방 안에서 기도했다. '부디 이번 겨울이 내 인생에서 가장 추운 겨울이 되게 해 달라'고. 그때 방문에 달려있던 거울 속의 나와 마주치며 울었던 내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그러나 끝내 나는 서울을 이기지 못했다. 거리와 교정 곳곳이 추억만으로 가득 찬 서울은 내게 '가장 잔인한 도시'였다. 그렇게 1년 정도 서울을 떠나있었다.


1년 후 돌아온 서울은 놀랍게도 '머물고 싶은 도시'가 되어있었다. 길가의 건물 하나, 교정의 나무 하나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학교 밖 사람들을 만나는 일도 늘 나를 설레게 했다. 스스로 혼자인 것에 익숙해지자, 오히려 서울은 내게 혼자가 아닌 시간들을 선물해 주었던 것이다.


지금 내게 서울이 어떤 의미냐고 묻는다면 '내 행복의 8할'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골목길을 찾아 다니거나, 숨은 맛집이나 술집, 옷집, 책방을 발견하고 혼자 간직하는 일이 즐겁다. 내가 친구라거나 직장 동료 혹은 지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의 8할 이상이 서울에 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20살부터 쉬지 않고 해온 연애의 8할 역시 서울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언제까지 서울에 살게 될지, 또 언제나 서울이 내게 지금과 같은 의미로 남아있을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어디에 있건 서울과 나란 사람을 떼어놓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때로는 가장 싫은 도시였다가 이제 내 행복의 8할이 되어버린 이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도시에, 오늘의 내가 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서울에서 하루만큼의 행복을 채우려 몸부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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