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5. 00:23 호양의/영화
'숏 텀 12', 상처받은 이들이 회복되는 곳
숏 텀 12, 상처받은 이들이 회복되는 곳
사실 처음 몇 분간은 이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너무 잔잔한 색감에다 시시콜콜한 대화로 이루어진 첫 장면에 대한 인상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 확신했다. '숏 텀 12'라는, 뭔가 알 수 없는 이름의 이 영화를 앞으로 꽤 오랫동안 기억하고 지인들에게 추천해 줄 거라는 걸. (이하 스포일러 주의)
여주인공 그레이스(브리 라슨 역)는 숏 텀 12라는 청소년 위탁 관리 시설에서 일하는 선생님. 그녀는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정신적인 질환 등 피치 못할 이유로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없는 청소년들을 보살펴 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을 끌었던 첫 번째 아이는 '마커스(키스 스탠필드 역)'.
곧 18살을 맞이하는 소년인 그에게는 마약 중독에 시달리는 엄마 밑에서 보낸 불우한 어린 시절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하게 남아있다. 영화 속에서 그가 엄마로 대표되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담아 쓴 랩을 하는 장면이 인상 깊다. 유튜브에 그 부분만 따로 편집한 영상이 있을 정도. (아래 영상 참조)
타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 채 살아가는 그가 유일하게 애착을 보이는 대상은 자신이 키우는 어항 속 물고기 한 마리. 곧 성인이 되어 숏 텀 12를 떠나야 하는 그에게는 유일한 친구였던 셈.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물고기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게 되고, 마커스는 앞으로의 삶에 대한 의지를 놓아버리고 자신의 손목을 그어버린다.
다음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캐릭터는 '제이든(케이틀린 디버 역)'.
엄마의 죽음 이후 아빠와 단둘이 살며 학대를 당해온 소녀다. 어린 시절, 제이든과 비슷하게 아빠로부터 성폭행을 비롯한 갖은 학대를 당했던 그레이스는 제이든을 보며 차라리 잊고 지내고 싶을 정도로 불행했던 자신의 과거와 직면한다. (개인적으로 숏 텀 12에 머무는 아이들의 내적 갈등뿐 아니라, 이들의 보호자이자 선생님인 그레이스의 내면적 갈등과 성장 역시 담아냈다는 것이 꽤 마음에 들었다)
제이든 역시 마커스와 마찬가지로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쉽게 열지 못했지만, 숏 텀 12에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조금씩 나아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레이스의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 속에서 그녀에게 차츰 마음을 열게 되고, 자신이 쓴 이야기를 들려준다.
문어와 상어가 등장하는, 얼핏 보면 동화와도 같은 이 이야기는 섬뜩하기 그지없다. 마커스가 랩의 가사로 그의 아픔을 표현했다면, 제이든은 동화에 자신의 상처를 담아낸 셈. (아래 영상 참조)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던 건, 무수한 상처를 가진 그레이스를 향한 메이슨(존 갤러거 주니어 역)의 무한한 믿음과 사랑이었다. 그녀는 혼자서도 강했지만, 그가 곁에 늘 있어줌으로써 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어쩌면 부러웠던 것도 같다. 서로를 이해하고 기다리며 나아지는 그 모든 과정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가장 약한 모습까지 내비칠 수 있다는 것이.
얼마 전 다녀온 소설가 박범신의 강연에서 그가 그랬다. 사랑은 '있는 것'이 아닌 '없는 것'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돈이 있어서'나 '키가 커서' 사랑할 것이 아니라, '돈이 없지만' '키가 작지만' 그래도 사랑해야 한다는 거다.
숏 텀 12에서 메이슨이 그레이스에게 보여준 사랑은 바로 그랬다. 그는 그녀의 불안한 영혼과 상처까지도 감싸주고 싶어 했고, 그것을 거부하는 그녀를 끝까지 기다려주고 용서해주었다. 맞아- 사랑이 저 정도는 되어야지, 싶었다.
꼭 내가 받고 싶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주고 싶은 사랑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부분까지 사랑할 수 있는 그런 거.
여하튼, 지금까지 나열한 이 모든 사랑스러운 지점들을 한꺼번에 담고 있는 영화를 보고나면 당신의 마음도 따뜻해지리라. (혹은 외로워지거나!)
이런 좋은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
P.S) 땡스 투 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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