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3. 23. 22:30 호양의/일기

시간의 미학




오랜만에 나를 나 다음으로 가장 잘 이해해주던 사람과 대화를 했다. 허물 투성이였던 우리의 마지막 대화는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 없고, 오늘은 똑같은 두 사람의 대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완벽했다. 시작부터 끝까지. '나 그냥 너랑 이야기 하고 싶어'란 한 마디에 순순히 '그러자'라고 해 주었다. '어떻게 지냈어?'란 싱거운 질문에 '너랑 똑같았을 거야'라는 싱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좀 지치는 것 같아'란 투정에 '네가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라는 위로를 받았다. 그리곤 '오늘 안 그래도 네 이야기를 했었어'라며 나란 사람에 대해 나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그 아이를 들었다(listened). 예전엔 지독히도 싫었던 그 논리와 말투가 오늘은 왠지 참 편했다. 조금 우습고 설렜다.


지나고 보니까 정말 그렇구나. 미움도 아픔도 사라지고 좋았던 기억만 남았네. 내가 참 어렸구나, 내가 좀 더 이해해줄걸, 내가 너무 모질었구나. 지나고보니 많은 부분들이 내 잘못이었구나. 기대하는 것이 많았고 그만큼 실망하는 것도 많았었네. 그래도 미안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저 '나도 너를 이해한다'는 말을 전했다. 이제야 이해한다고. 지나고 보니 너를.


내가 참 많이 너를 좋아했구나. 그런데 그 좋아함이 그토록 왜곡되었었구나. 우리는 이만큼이나 자랐구나. 다 덕분이야. 고맙다. 지금보다 못났던 나를 참아주고 이해해주고 끝까지 놓지 않아 주어서. 나를 나 그대로 받아들여주어서. 내가 네게 특별한 존재였다고 말해주어서.


슬프지 않았다. 시간의 미학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더이상 함께이지 못함을 안다고 해도 그것조차 서로가 아닌, 그저 인연을 탓하며 덤덤해질 수 있는 것. 애쓰며 아등바등하지 않는 것. 잔잔히 흘러가는 감정을 온전히 마주하는 것. '날 보러 올거야?'라는 사랑스러운 질문에 '미안. 그건 약속할 수 없어'라는 무책임한 대답에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너를 응시하는 것.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 속, 그 몇 안되는 내 사람들 가운데 네가 있어 주어서 참 다행이다.


이제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유리 조각같은 말들에 베이지 않으면 좋겠다. '너 가끔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잖아'라며 의미없이 널부러져 있는 내 말들을 조심스레 주워 담아 건네주면 좋겠다. 그리고 그래줄 수 있는 사람이라서 나는 참 당신이 좋다. 시간이 흐름이 아름다움은 당신과 내가 그 시간과 함께 흘러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렇게 또 하루만큼 자라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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